워케이션과 정신 건강

 회복인가 도피인가?

디지털 노마드가 겪는 고요한 위기와 그것을 마주하는 법

2025년 현재, ‘워케이션’은 일과 휴식의 균형을 찾기 위한 혁신적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인스타그램 피드 속 강릉의 노을 지는 카페, 제주의 조용한 한옥 숙소, 발리의 해변가 코워킹 스팟을 보며 “나도 저기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실제로 워케이션을 떠나본 나의 경험은 달랐다.

내가 처음 워케이션을 시도한 이유는 단순한 ‘업무 효율 향상’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지속되는 스트레스, 감정의 무기력함, 일상 속 회복 불가능한 피로감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는 일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아니라, 일과 함께 ‘지금의 나’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글은 워케이션이 단순히 트렌디한 근무 방식이 아닌,
심리적 회복의 수단이 될 수 있는지, 혹은 그저 '잠시 피한 착각'에 불과한지를 경험을 바탕으로 진지하게 돌아보는 글이다.

📚 목차

1. 나는 왜 워케이션을 떠났는가 (회복을 가장한 도피)
2. 낯선 공간에서 마주한 고요한 감정
3. 일과 마음의 균형은 장소가 아닌 구조에서 시작된다
4. 진짜 회복을 위한 워케이션의 조건
5. 도망치듯 떠나도, 결국 나를 마주해야 한다

 

나는 왜 워케이션을 떠났는가 (회복을 가장한 도피)

 

나는 2024년 여름, 심한 번아웃을 겪고 있었다.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고 회의를 이어갔지만,
정작 나 자신이 점점 비어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지인이 강릉에서 한 달 살이를 하며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무작정 워케이션을 결심했다.

당시 나는 “공간이 바뀌면 마음도 바뀌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짐을 쌌다.
숙소는 예쁘고 조용한 곳이었고, 와이파이도 잘 터졌으며, 맛있는 음식과 친절한 사람들까지 있었다.
하지만 3일이 지나자 문제는 나타났다.
낯선 공간이 오히려 내 감정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무기력함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이 워케이션은 회복이 아니라 도피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장소는 바꿀 수 있지만, 그 안에 있는 나 자신은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인정하게 되었다.

 

낯선 공간에서 마주한 고요한 감정

워케이션의 가장 큰 장점은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이 사라지면, 오히려 우리가 억눌러 두었던 감정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강릉의 바닷가 앞에 혼자 앉아 있던 그 순간,
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오히려 불편하게 느꼈다.
무언가에 쫓기듯이 메일함을 열고, 업무 채팅을 확인하며
‘일하지 않으면 무가치하다’는 내면의 믿음과 마주했다.

그 고요함은 낭만적이지 않았다.
조용한 공간 속에서 나는 오히려 더 시끄럽게 내 생각과 감정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많은 디지털 노마드들이 경험하는 심리적 허무감이다.
새로운 환경, 예쁜 장소, 자유로운 시간 안에서도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는 지금 정말 살아 있는가?”

 

일과 마음의 균형은 장소가 아닌 구조에서 시작된다

 

나는 그 이후, 워케이션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점점 한 가지 진리를 체감했다.
진짜 회복은 장소가 아닌 구조에서 온다.

단지 도시를 떠난다고 해서 휴식이 생기는 게 아니었다.
스케줄을 바꾸고, 일의 우선순위를 정리하며, ‘비워도 되는 시간’을 의식적으로 만들어야
비로소 몸과 마음이 회복될 여지가 생겼다.
특히 나는 ‘오전 3시간 집중 근무 – 오후 감정 정리 – 저녁 자유시간’이라는 루틴을 만들면서
점점 내 삶을 다시 회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건 ‘일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일과 감정이 충돌하지 않도록 설계하는 것’ 이었다.
즉, 워케이션은 외부 조건의 변화가 아니라, 내부 구조를 새로 짜는 도전이라는 점이다.

 

진짜 회복을 위한 워케이션의 조건

 

내가 느낀 진짜 회복형 워케이션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1. 고요한 공간보다 고요를 받아들일 용기
   – 조용한 장소에 있다고 고요한 마음이 찾아오진 않는다.
2. 일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시간 구조
   – 카페, 코워킹 스페이스보다 중요한 건 시간을 비워둘 수 있는 루틴이다.
3. 함께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속 거리감
   – 모든 모임이나 소통에 응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이 필요하다.
4. 결과를 위한 일이 아니라 흐름을 위한 삶
   – 일정, 목표, 보고서로 나를 증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살아 있는지를 확인하는 삶

이 기준을 따라 워케이션을 실천한 이후,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공간’이 아닌
‘다시 살아가고 싶은 나 자신’과 만날 수 있었다.

 

도망치듯 떠나도, 결국 나를 마주해야 한다

 

워케이션은 단지 근무 형태의 변화가 아니다.
그 안에는 일에 지친 자신을 회복하고 싶은 간절함,
어딘가에 나를 숨기고 싶은 무의식적인 충동,
그리고 때로는 내가 나를 다시 만나기 위한 깊은 갈망이 들어 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워케이션을 ‘도피’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도피조차도 나에겐 필요한 회복의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도망치듯 떠났지만, 결국은 그곳에서 다시 살아갈 방향성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워케이션은 마음이 아픈 사람에게도,
삶을 재정비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그리고 단지 조용한 하루가 필요한 사람에게도
충분히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단, 장소가 전부가 아님을 기억하자.
회복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방식 안에 있다.